소개
영화의 이야기는 단지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로만 결정되지 않습니다.
어떤 사건이 어떻게 구성되었는가, 즉 각본의 구조가 영화의 스타일을 좌우하는 핵심입니다.
범죄, 가족극, SF와 같이 서로 다른 장르는 각기 다른 방식으로 서사를 배치하며 관객과 소통합니다.
이 블로그에서는 한국 영화 속 세 장르를 중심으로, 각본 구조가 어떻게 장르의 정체성을 만들어내는지 살펴보겠습니다.
범죄
범죄 영화의 각본은 대부분 ‘시간’과 ‘정보’를 다루는 방식에서 출발합니다.
누가 범인인가, 왜 저질렀는가, 어떤 방식으로 밝혀질 것인가—이 모든 질문에 대한 서서히 밝혀지는 진실이 이야기의 중심입니다.
각본은 대체로 다층적인 구조를 가집니다. 현재-과거를 오가거나, 서로 다른 시점에서 바라본 사건들이 교차하며, 관객은 단서를 따라 스스로 조합해야 합니다.
한국 범죄 영화 중 대표작인『살인의 추억』을 보면, 단순히 범인을 쫓는 형사들의 이야기 같지만, 구조적으로는 계속해서 관객의 기대를 무너뜨리는 식으로 설계되어 있습니다.
범인이 나올 듯하다가 사라지고, 단서가 결정적일 듯하다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는 구성은 심리적 미로처럼 짜여 있습니다.
이와 유사하게 『신세계』는 조직 내부의 배신과 이중성이라는 테마를 중심으로, 진실과 거짓이 반복되며 점점 정체성이 흔들리는 주인공을 따라가도록 설계되어 있습니다.
범죄 영화 각본의 또 하나의 특징은 "정보 우위"의 활용입니다. 어떤 인물이 어떤 정보를 먼저 아느냐에 따라, 관객의 감정선이 함께 흔들립니다.
그래서 범죄 장르는 대개 2막 후반에 전환점이 크게 오고, 마지막에는 모든 퍼즐이 맞춰지는 카타르시스를 제공합니다.
단순히 '범인을 찾는 것'이 아니라, 진실과 거짓, 정의와 악 사이에서 균형을 찾아가는 과정 자체가 이야기의 무게 중심이 됩니다.
가족극
가족극은 외적인 사건보다 내면의 변화에 중심을 둡니다.
이 장르의 각본은 드라마틱한 반전보다는 관계의 변화, 감정의 쌓임, 말하지 못한 이야기들이 서서히 드러나는 방식을 취합니다.
그래서 구조는 상대적으로 단순한 선형 플롯을 따르되, 감정 곡선이 점진적으로 고조됩니다.
예를 들어, 영화 『우리들』은 초등학생 사이의 작은 오해로 시작된 감정의 균열을 다루는데, 구조적으로 보면 매우 단순한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인물 간의 대화, 침묵, 시선, 그리고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관계의 미묘한 변화가 점진적으로 드러나며 관객의 감정이 깊어집니다.
가족극에서 중요한 건 전환점보다 감정의 흐름입니다. 서사적으로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보다는 ‘왜 그렇게 느꼈는가’, ‘어떻게 받아들이게 되었는가’가 더 중요합니다.
때문에 이 장르의 각본은 플래시백, 편지, 기억 회상 등의 장치를 활용해 현재와 과거의 감정선이 자연스럽게 이어지도록 만듭니다.
또한, 가족극에서는 주요 사건이 외부보다 내부에 있습니다.
사고, 죽음, 이혼, 갈등 등의 외적 사건이 일어나더라도, 그 사건보다 그 사건에 대한 반응과 가족 간의 태도 변화가 본질입니다.
그래서 이런 영화는 결말에서도 확실한 ‘해결’보다 열린 결말, 또는 조용한 화해로 끝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것이 오히려 더 깊은 여운을 남기기 때문입니다.
SF
SF 장르에서 각본은 ‘기승전결’보다 세계를 어떻게 설계하느냐가 우선입니다.
다른 장르가 인물 중심이라면, SF는 '세계 중심의 이야기'가 많습니다.
그래서 영화의 초반 30분은 대부분 이 세계의 규칙, 기술, 질서, 역사 등을 설명하는 데 사용됩니다.
이 과정을 우리는 흔히 ‘설정의 설명(exposition)’이라고 부릅니다. 예를 들어, 한국 SF 영화 『승리호』는 우주 쓰레기를 청소하는 노동자들의 이야기지만, 그 이전에 '우주에 떠 있는 한국인', '지구는 오염되어 더 이상 살 수 없음', '우주에 또 다른 인공지능 아동이 존재'라는 전제가 있습니다.
이 모든 정보는 초반에 효과적으로 설명되어야 하며, 이후의 이야기 전개는 이 설정 위에서만 설득력을 가집니다.
SF 각본에서 중요한 또 하나는 ‘문제 제기의 해결’의 순환 구조입니다.
세계관 내에서 문제가 발생하고, 주인공은 기존의 규칙을 깨거나 확장하면서 해결점을 찾아가야 합니다.
이는 단순한 외적 전투보다 철학적, 과학적 질문이 뒷받침되었을 때 더욱 강력한 스토리로 작동합니다.
『방법: 재차의』나 『지금 우리 학교는』 같은 작품도 세계관이 흔들리는 순간에 이야기가 탄력을 받습니다.
마지막으로 SF의 각본은 대개 복선과 회수가 치밀하게 맞물립니다.
처음엔 무심코 지나쳤던 기술, 인물, 대사가 마지막에 결정적인 열쇠가 되며, 관객은 이 세계의 ‘퍼즐’을 완성하는 감각을 얻게 됩니다.
그래서 SF 영화는 한 번보다 두 번 봤을 때 더 재미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정보의 밀도와 설계력이 바로 이 장르의 각본적 미덕입니다.
결론
범죄는 ‘퍼즐’, 가족극은 ‘감정곡선’, SF는 ‘설계된 규칙’으로 이야기의 틀을 만듭니다.
같은 2시간짜리 영화라도, 각본의 구조에 따라 장르가 주는 감정과 몰입 방식은 전혀 다릅니다.
다음 영화 감상에서는 ‘이 이야기는 어떻게 짜였는가’를 눈여겨보시기 바랍니다.
그 안에 숨어 있는 작가의 고민과 장르의 철학이, 영화를 더 깊이 이해하는 열쇠가 되어줄 것입니다.